해외여행

중국 운남성 (나평,홍하) 여행기 (2007년 2월 26일~3월 6일)

럭비공2 2013. 9. 21. 17:34

중국 운남성엘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곳을 정리할겸 여행기를 9일에 걸쳐 보내 드리고자 하오니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 주십시요.

 

작년부터 통 바깥 바람을 쏘이지 못해 몸을 비비틀고 있을 때 동생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여행사에서 이번에 나평, 홍하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팀이 있는데 갑자기 한 명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으니 그 구멍(?)을 나보고 메꾸어 보라고.

실은 자신보고 가라고 하는데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느라 여러날 비울 수가 없노라면서...

대신 여행비를 많이 절감해주겠다고 하여.

이 기회를 놓치면 바보지.

앞 뒤 가릴것 없이 Okay! 

단번에 승락해 놓으니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2월 26일부터 3월 6일까지 (7박 9일)    

퇴직한 남편을 혼자 놔두고 떠나자니 마음은 아프지만 노인병원에 계신 老母를 매일 찾아 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그를 여행에 동참시키기에는 좀 부담이 된다.

우리 둘 다 여행중에 어머니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사실 이러한 께림직함이 1년간 여행을 못하게 된 이유였다.

설날 명절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자 여행준비를 하였다.

옆방에 큰 보자기를 펴놓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물건을 찾아 보자기 위에 떨어뜨려 놓는다.

운남성은 사계절이 모두 봄같아 春城이라 할 정도로 20도~25도 정도. 중국에서 유명한 휴양지.

봄 여름에 입는 기능성 등산복으로 준비(기능성 옷은 가볍고 구김이 없고 편함)

큰 서점에 가서 중국 전체를 볼 수 있는 地圖도 구입하고.

유기농 가게에서 누룽지도 두 봉지 구입 (지난 이집트 여행 때 매우 요긴한 간식이었음)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 인천공항 출발- 중국 운남성 곤명 도착)  제 1일

아침에 늘 하던 운동을 생략하고 음식 준비를 한다.

집에 홀로 남아 있을 남편을 위하여 국과 카레를 준비하고 나물이랑 조림,

잡곡밥도 한솥하여 밥공기마다 밥을 퍼서 식혀 놓고....

청소는 어제 말끔히 끝냈으니 되었고.

큰 보자기에 쌓아 놓은 물건들을 여행가방에 담아 준비를 끝내놓고, 은행에 가서 환전하고(비상금 100불+중국돈 300위안)

외출했던 남편이 돌아와 나를 리무진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준다.

마음 편히 즐겁게 놀다 오란다.

전에는 여행 떠나는 나를 꼭 울려 보내더니 그동안 많이 반성(?) 했나 보다.

 

인천공항 3층 출국장 9번 출구에 있는 휴게의자. 오후 4시.  

난 혼자이지만 안면있는 얼굴들이 눈에 뜨인다.

내 친구의 큰 동서와 그의 일행(5명), 전에 동아문화센터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숙대 선배 K와 그 일행(9명).

처음 보는 부부와 나와 같은 싱글 1명, 모두 합하여 우리 팀이 18명이다.

TC가 내 룸메이트를 소개해준다.

무조건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이는데 선배 K가 내 옆에 와서 귀뜸을 해준다.

대학 교수님이고 부산의 준재벌집의 따님이라고....이번에 3자매가 같이 여행하게 되었다나.

이러한 정보들이 내 여행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짐을 부치고 나서 약국에 들러 인공 눈물약을 사고 슈퍼에서 녹차도 한 병 샀다.

아까 선배 K가 억지로 입에 넣어주던 찹쌀떡이 무척 갈증을 일으킨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을 기웃거리다가 화장품 가게에서 아이크림과 남편용 에센스를 샀다.

시중보다 20% DC되어 대체로 공항 면세점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화장품을 즐겨 찾는다.

대기실에서 이미 와 있던 친구의 큰 동서와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대한항공 기내. 오후 6시 40분 출발.

다행이도 내 옆의 의자는 비어서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책을 보다가 기내식도 먹고.

 

 

5시간 비행 끝에 곤명에 도착. 시계를 1시간 뒤로 맞춰 놓는다.

중국시간으로 밤 10시 반 쯤. 공항이 작아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와 에어버스를 타고 청사로 들어가 입국 수속을 밟는다.

짐을 찾아 로비로 나오니 마사장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 해준다.

마사장은 19일날 이미 여기에 와서 여행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이번엔 두 팀이 함께 여행하게 되었는데 인천공항에서 수속을 밟아주던 TC는 강남 성당팀을 맡고

마사장은 우리팀을 맡게 되었단다.

버스로 이동하며 가이드가 인사를 한다.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왔다는 교포 남성. 李선생.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에 도착. 방에 들어서니 마사장이 넣어준 과일이 탁자위에서 우리를 반긴다.

사과랑 배,한라봉과 똑같이 생긴 작은 오렌지랑....

과일을 먹으며 룸 메이트인 김교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경원대 섬유미술과에 적을 두고 있는데 한국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개학하게 되어 마음이 좀 무겁단다.

내일 입을 옷을 택하여 옷장에 걸어놓고 가방을 대충 정리하고는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2007년 2월 27일 (곤명-육양-나평)  제 2일

6시 반 morning call.

쉽게 잠들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뒤늦게 엎어져 잠이 들었나본데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퉁퉁 부어있다.

늦은 밤에 배를 통째로 다 먹었으니...

이상하게도 중국에만 오면 두통이 심하여 지난번처럼 과일을 먹으면 감쪽같이 통증이 없어졌던 경험이 있어서.

두통은 없어졌는데 부은 눈은 어쩐다지???

조식은 뷔페. 열심히 왔다갔다 하며 맛있는 걸 충분히 먹었다.

오지로의 여행은 우선 음식 먹기가 힘들어질테니까.

 

운남성은 중국의 남쪽에 있는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가려고 하는 코스는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에서

동남쪽 오지에 속한다.

나평은 전체가 유채꽃으로 뒤덮여 있고, 홍하는 1400 여년간 소수민족들이 조상대대로 산을 개간하여 일군 다락논을 보고자

이렇게 나선 것이다. 소수민족들의 고단한 삶의 터전을 보며 과연 무엇을 얻어 갈것인가?

 

8시 반 출발.

버스에서 김치 냄새가 나는걸 양해해 달라고 마사장이 말한다.

운남성에서도 오지중의 오지로 가기 때문에 음식이 입에 맞지않아 곤명에서 아예 김장을 하여 버스에 실고 다니며 여행내내

이 김치를 썰어 내놓을 거란다.

가이드 李선생이 중국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중국 인구는 13억. 행정 구역은 23개의 성(대만 포함). 소수민족  56개. 소수민족이 전체의 10%를 차지한단다.

소수민족중 조선족이 200만명 정도인데 주로 동북 3성(리오닝,길림,흑룡강)에 거주하며 교육열이 높아

우수한 민족에 속하며 현재 30만명이 한국에서 근로자로 일한다.

13억 인구중 농민이 8억명.

전에는 10억 정도였다가 젊은이들이 도시로 진출하여 이 정도인데 농촌과 도시인의 소득수준은 7배 차이.

소수민족들은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 피신하여 주로 산지에서 생활.

운남성은 92%가 험한 山地인데 소수민족들이 이곳으로 피신해와서 산기슭을 개간하여 수동으로 농사를 짓어 생활한다.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은 바깥 일은 물론 가정의 주방 일도 남자가 한다.

소수민족은 반대로 여자가 가정뿐만 아니라 바깥일까지 해야 하는데 정작 남자들은 육아나 노름으로 시간을 보낸단다.

중국은 1975년 등소평에 의해 집단농장이 서서히 가정단위로 이동하다가 80년도에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금도 토지 소유권은 국가가 갖고, 경작권은 농민이, 조세권은 국가가 소유한다.

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가능한한 자식들을 많이 낳도록 장려하였는데 지금은 인구팽창이 심각하여

한족은 1명이상 낳으면 벌금을 내야하는데 소수민족들은 2명까지만 허용이 된다나.

 

羅平으로 가는 길에 온통 돌밭으로 이루어진 石林을 구경한다.

버스에서 내려 돌밭을 걸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과 맑은 공기, 푸르른 하늘을 만끽한다.

낮은 구릉과 황토흙, 나지막한 흙담 집들이 참으로 정겹다.

다시 버스에 올라 차창으로 들어오는 농촌 풍경들을 바라본다.

보리 이삭이 제법 패이고, 마을마다 복숭아 꽃이 소박하게 피어 있다.

나의 살던 고향~ 이 여기에 있다.

 

육양에서는 沙林을 보기 위하여 공원에 들렀다.

명칭은 陸楊彩色沙林. 여러가지 색깔이 들어간 모래가 굳어져서 만들어진 기암 괴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에선 매년 세계의 모래 조각가들이 참가하여 다양한 모래 색을 이용한 조각 작품들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단다.

공원 입구에 있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 식사후에 들른 화장실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칸막이와 문짝은 하나도 없이 변기만 서너개가 있는데 처음이라 우리 일행들은 길게 줄을 서서 한 사람씩 들어가

일을 보고 나온다.

 

나평으로 가는 길은 작년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를 달렸다는데 1년 사이에 고속도로가 뚫려서

예정보다 일찍 나평에 도착했다.

나평으로 다가 갈수록 노란 유채꽃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산기슭 뿐만 아니라 산꼭대기에도 유채꽃이 피어 있다.

우리가 내린 곳은 사방 시선이 닿는 끝까지 온통 유채밭이다.

광활한 평지에 360도를 돌아봐도 노란색 천지다. 서울시 면적의 6배 크기라나.

저 멀리 산봉우리가 둥글둥글한 계림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줄지어 있고 가까운 유채밭에도

둥근 봉우리를 한 산이 불쑥 불쑥 솟아있다.

큰 길가에는 유채꿀을 파는 마을 사람들이 질서없이 난립해 있는데 거무틱틱한 남루한 옷차림에 유채꿀을 담은 허름한 병들이랑

말라 비틀어진 가느다란 생무우를 파는 사람들도....그저 고단한 삶이 배어 있다.

마차를 타고 유채꽃밭 속으로 들어간다. 밭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들어가며 말없이 그들을 바라본다. 가슴이 먹먹하다.

마차에서 내려 좁은 밭 이랑을 걷는데 유채꽃나무가 우리 키를 넘는다.

유채는 어릴 때 나물을 해먹고, 종자는 기름을 짜며, 다 자란 키 큰 줄기는 잘라 가구의 방습제로 쓰인단다.

이곳 나평의 농민들은 유채꽃이 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란다.

1000 여년 조상대대로 이어온 광활한 농토를 손수 갈아 엎어 파종하고, 김매기를 하며 가꿔온 유채가 꽃이 필 때는 휴식을 취하며

세계 곳곳에서 찾아와 주는 관광객을 맞이 한다.

1년중 딱 한 달간.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만 관광객들이 북적대다가 물러가면, 유채씨를 수확하고 난 땅을 다시 갈아 엎고

담배를 심는 고달픈 생활이 시작된단다.

 

바람이 점점 심하게 불어 잠시 호텔에 들러 체크인하고 일몰을 보기 위하여 다시 유채밭으로 향한다.

유채밭에 우뚝 솟은 산으로 올라 갔다.

사진 작가들이 일몰 사진을 찍기 위하여 사진기를 세워놓고 진을 치고 있다.

아까 보았던 노란색이 햇빛의 각도가 점점 기울어 가면서 색상도 점점 푸른빛을 띠어 간다.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이 그 시대에 여기를 다녀 갔더라면 어떤 색상으로 표현해 놓았을까?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 그림이 떠오른다. 노란 해바라기의 배경도 노란색이었지.

제주도의 노란 유채색은 검은 돌담과 푸른 바닷물 색이 배경이 되어 여기 꽃색깔과 다르다고 미술 전공한 내 룸메이트는 말한다.

달빛에 보는 유채꽃은 어떤 빛깔을 띨까?

 

저녁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오늘 저녁에 발 마사지를 받아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가이드 한테 물어보니, 신청하면 숙소로 와서 해준단다.

내 룸메이트도 한다 하니 구경하는 것보다 나도 해보자고 신청했다.

방에 들어와 씻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젊은 남녀가 들어온다.

아가씨가 나를 맡아 해 주는데 얼굴과 머리 전신을 누르고 두드리고 비틀고....

발 마사지가 아니고 전신 안마라고나 할까.(80위안*130원=10400원)

 

 

2007년 2월 28일 수요일 ( 나평 )    제 3일

Morning call 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지난 밤  전신 안마를 받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깊은 잠에 빠졌었다.

벌써 내 룸메이트는 일어나 화장실에서 단장을 마친 후였다.

옆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무척 조심하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서 옆사람을 늘 배려하려는 성품과 외모가

일본사람과 비슷하여 혹시 일본에서 성장하였거나 공부하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았다.

자신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에는 친족이 있어서 가끔씩 간다고 한다.

앞으로 5년후엔 대학에서 은퇴하게 된다면서 날보고 어떻게 과감히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냐면서 서로 궁금한 것을 물어 본다.

대략 나보다 4살 위쯤 되시는데 깍듯하게 대해 주신다.

 

호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식사가 나왔는데 흰죽, 따뜻한 우유, 삶은 계란이 나와 대환영을 받았다.

그동안 날라갈 듯한 푸석 푸석한 밥을 먹느라 좀 힘들었는데. 근데 왜 우유 맛은 달까?

그래도 일행들은 밑반찬을 많이 가져와서 여행사에서 내놓는 김치와 깻잎,멸치 볶음,고추장까지 있어 하나도 준비없이 온 내겐

염치없이 매우 맛있게 먹어주는 걸로 감사의 표시를 한다.

 

8시 반 출발.

38인승 버스에 18명의 일행과 마사장, 가이드 李선생과 이 지역 로컬 가이드,운전기사등 22명이 탔다.

버스 뒤쪽엔 자리가 남아서 난 뒷 좌석으로 가서 널찍하게 앉아 넓은 중국지도를 펼쳐 보고 때로는 순간의 느낌을 기록도 한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에 산자락은 물론 산꼭대기에도 펼쳐지는 노란 유채꽃 행렬에 감탄사가 연발 터진다.

어제 평지에 펼쳐진 유채꽃보다 오늘 아침에 보는 유채는 훨씬 환상적이다.

게다가 산자락 밑으로 하얀 안개가 길게 드리워져서 얼마나 흥분들을 하는지 운전기사가 차를 세운다.

산자락을 가까이 보니 그저 손바닥만한 평지라도 개간하여 유채를 심었고 바위돌들은 그대로 둔채 그 옆으로 왠만한 곳은

모두 유채를 심어서 마치 설치 미술을 해놓은 듯 기하학적인 문양의 유채꽃밭을 일구어낸 것이다.

1000년의 세월을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이곳 소수민족들의 생활터전이, 먼 외국 관광객의 눈에는 그저 설치미술 작품처럼 보인다.

어제 내 룸메이트 3자매가 썼던 유채꽃으로 만든 화관을 오늘 우리 일행 모두가 돌아가며 쓰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동막골"에 나오는 (미친) 처녀처럼......50대~60대의 나이들이 모두 10대의 사춘기로 되돌아간 듯.....

 

구룡폭포 풍경구. (풍경구=국립공원)

입구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유채꽃으로 만든 화관을 가지고 나와 쫒아다니며 구매를 강요하는데 난 잔돈이 없어 좀 미안했다.

이곳 마을은 보이족이 산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체구가 작고 머리통이 작아 그들 머리통에 맞는 화관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는데 우리네 머리통에는

걸치지도 않아 손에 들고 다니다가 버스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보이족들은 노래를 매우 잘한다.

그래서 젊은 남녀들은 노래를 주고 받으면서 눈이 맞으면 여자 집에서 2년간 살면서 아기를 낳은 뒤 결혼을 한다나.

다시 말하면 건강한 씨(?)를 확인하고서야 결혼한다는 얘기다.

공원길가에 고구마를 쪄서 파는 아낙네를 만나 일행중 S가 잽싸게 몽땅 사서 돌린다. 호박 고구마 맛이 아주 일품이다.

10단으로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보기 위하여 케이불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른다.

시원한 바람과 밝은 햇살, 멀리 쏟아지는 폭포, 보이족들이 전통 옷을 빌려주고 사진찍는 일행들, 전통 옷을 입은 여자들은

수예품을 팔면서 매우 능숙한 솜씨로 십자수를 놓는다.

걸어 내려 오다가 폭포 아래에서 간이 뗏목을 타고 폭포 바로 밑까지 갔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마사장이 길가에서 파는 싱싱한 무우를 사서 돌린다. 고랭지에서 재배를 한 탓인지 시원하고 매우 달다.

서산 언니들과 굵직한 칡뿌리를 사서 열심히 씹으며 옛 고향 얘기를 하면서 내려오는데 앞서 내려온 우리 일행들이 빙둘러 서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로컬 가이드인 한족과 보이족 아가씨의 노래가 이어진다. 흥이 났는지 춤까지 추면서.....참 귀엽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협곡으로 가는데 차창으로 들어오는 유채밭이 마치 요술을 부린 듯, 어떤 산은 회오리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산꼭대기에도 조금 평평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유채가 피어있다. 농민들의 성실함과 고단함, 경이로움....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곳의 젊은이들도 도시로 진출하여 노동력이 대폭 줄어들어 앞으로 몇년 뒤에도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단다.

경사진 밭에 나무가 심어진 곳이 간간히 눈에 뜨이는 걸 보면 이런 사실이 곧 닥칠것만 같다.

 

 

대기실에서 유람선을 기다리는데 마사장이 사준 아이스바를 먹으며 즉석에서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로컬 가이드와 마사장이 노래를 하니 성당팀이 합창으로 答歌를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유람선을 타고 1시간 반 가량 협곡을 유람. 깍아지른 절벽에 동굴이 보이고 보이족이 사는 마을도 보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말없이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명상에 잠기다가....졸다가.....

 

다시 버스를 탄다. 뒷좌석에 앉으니 쉴새없이 먹을 것들이 돌려진다. 육포,비타민C,초콜릿,사과등등...

어느 만큼 왔을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온통 유채밭인데 원형경기장이 여기저기에 생겨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건 과학시간에 가르쳤던 "돌리네"였다.

석회암 지대에서 땅속으로 이산화탄소가 녹은 물이 스며들어 석회암을 녹여서 동굴을 만들어 오랜 세월이 흘러 동굴이 커져서

무너져 내린것이 돌리네이다. 돌리네가 많은 지형을 카르스트 지형이라 한다.

후에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냥 석회암 지대를 카르스트지형이라 하고 히말리아 산맥이 이어져 계림과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의 하롱베이까지 이어지는데 이것을 카르스트 지형이라 한단다.

돌리네는 지표면에서 보면 원형으로 푹 꺼져서 평평한 지형이 되는데 여기서는 개간을 하여 유채를 심어 꽃을 피웠는데 마치

요술을 부려 놓은 것 같다.

 

저녁 식사는 매우 푸짐하다.

돼지 갈비 튀김, 계란찜,잉어 탕수육,은행야채볶음, 오이썬것 등등....여기에 김치, 한국 밑반찬까지.

 

 

2007년 3월 1일 목요일 ( 나평-구북 )  제 4일

8시 15분 출발하기전 씩씩한 로컬 가이드 아가씨와 작별.

작별의 선물로 사탕 한 봉지를 건네니 눈물이 핑돌며 내 손을 꼭 잡는다.

내 룸메이트는 컵라면 2개를 건네주고.

 

邱北으로 가는 길.

마사장은 이제부터 더 오지로 들어가기 때문에 화장실도 없어 노상 방뇨를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마을들. 있는 듯 없는 듯.

그도 그럴것이 그 지역에서 나오는 흙으로 흙벽돌을 만들어 담을 쌓고, 그 지역 흙으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덮었으니...

우리나라 농촌은 지붕색깔이 너무 튀어서 다 드러내놓는데 이곳 소수민족들의 마을은 참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집집마다 마당 한 켠에 분홍색 복사꽃이 피어 있어 어렸을 적 내고향 마을에 온 것 같다.

어느 만큼 갔을까. 조그마한 읍내에서 가이드가 공중 화장실을 찾아 내었다.

버스 2대에서 내린 한국 여인들이 한 곳을 향하여 가고 있으니 읍내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칸막이 없는 공중 화장실에서 여러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일을 보는 모습이 이젠 익숙해졌다.

그래도 노상 방뇨가 아닌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일행중 S가 잽싸게 사과 1상자를 사서 또 돌린다.

이곳의 소박한 마을 사람들을 닮아서인지 사과 또한 왜소하고 맛이 소박하다.

 

다시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이젠 계곡마다 바나나 나무가 가득하고 가로수도 바나나 일색이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이 열매는 사람이 먹는게 아니고 동물 사료용으로 쓰인단다.

일행중 한 사람이 차멀미를 심하게 하여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려서 대략 상황을 보아가며 노상 방뇨를 한다.

험한 산중이라 마을도 없는데 어디서들 나오는지 마을 사람들이 보퉁이를 짊어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 간다.

때로는 마차에 토종닭이랑 새끼 돼지도 실려 한무리의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지나간다.

어느만큼 가니 꽤 부적대는 장터에 닿았다. 우리는 내려서 장 구경을 하게 되었다.

새끼 돼지를 한 마리씩 자루에 담고 주둥이 있는 부분만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가축들을 가져와서 흥정하는 모습도 보이고, 뻥튀기 장수, 과일도 풍성하고 아주 싸다.

우리 일행들은 저마다 한 아름씩 장을 보아가지고는 버스에서 즐거운 파티를 한다.

한라봉, 찰토마토, 옥수수 튀긴것, 싱싱한 풋대추. 난 매우 굵직한 단옥수수(사탕수수)를 사서 껍질을 벗겨 토막내어 가져왔다.

마사장은 싱싱한 가죽나물을 세 묶음이나 샀다. 저녁 식사 때 살짝 데쳐 내놓을 거란다.

 

드디어 구북의 보자흑에 도착했다.

운남의 계림이라 불리는 곳. 구채구.장가계와 함께 이곳도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풍경구이다.

점심을 먹는데 배가 살살 아파온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중국 고위 관료들이 사용하는 별장이다.

이곳은 변변한 호텔이 없어서 마사장이 평소 알고 지내는 운남성의 과학기술부 장관의 도움으로 이곳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방마다 특색이 있고 Sweet room이 있어서 방key를 주욱 놓고 뽑기를 하여 방을 배정 받았다.

sweet room은 아니지만 우리방도 넝쿨식물로 장식된 창문을 통하여 호수가 보이는 곳이다.

집기들도 매우 고급스럽고 샤워부스의 기능이 꽤 다양하여 익히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러나 수압이 약하여 물줄기가 약한게 흠.

 

 

잠깐 휴식한 후에 나룻배를 타고 마을구경에 나선다.

6명씩 6대에 나누어 탄다. 노를 저어보니 자유형의 크롤과 같은 이치이다.

이족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간다.

6대의 나룻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장난기가 발동.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나룻배에서 내려 산으로 가는데 이족의 전통복장을 입은 자그마한 할머니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도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데 왜 내 눈엔 어설프게 보이는지.

산에 올라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중간중간 솟은 기이한 산들은 나평과 비슷하지만 평지는 유채꽃 대신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마차를 타고 다시 숙소에 와서 서로 방 구경을 다닌다.

정말 똑같은 방이 없고 다 특색이 있어 흥미롭다. 차를 마시며 담소.

저녁 식사는 양을 두 마리 잡아 구워서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아까 샀던 가죽나물도 있고.

 

달빛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동네 구경에 나선다.

마을 광장에는 동네 어른들이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텅 비어 있어서 그냥 들어오는데 대나무에 예쁜 조명이 달린 공원에서

민속공연 연습하는 팀을 만났다. 연습이 다 끝나 파장 하려는 것 같다.

마사장이 촌장을 만나 우리의 사정을 얘기하니 혼쾌히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간이 의자에 주욱 앉아 구경 한다.

우리 일행중 몇 명이 앞으로 나가서 그들과 함께 불을 피우는 의식을 한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을 처녀들이 한바탕 춤을 추고 들어가면 총각들이 나와 힘찬 동작으로 춤을 추고 다음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와서

애교스럽게 춤을 추워 웃음을 자아낸다.

다음엔 할머니 그룹이 나와서 춤추는데 제일 작고 연로한 할머니가 자꾸 틀려서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

3월 8일 소수민족들의 민속춤 경연 대회가 있어 맹연습중이란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촌장을 빙둘러 싸고 매우 고마웠다고 예를 표하고  마차 있는 곳으로 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기치않게, 민속춤 추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양쪽으로 서서 우리를 향하여 노래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감격스러워 서로 부둥켜 안고 고마워 했다.

내가 부둥켜 안고 있던 할머니는 내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하는 키에 조그만 손이 얼마나 거친지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이곳 소수민족들은 여자가 안과 밖의 일을 모두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임무를 타고 났으니

이 할머니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험난한 일을 하며 살아 왔을까?

모두들 상기된 표정으로 마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 오는데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2007년 3월 2일 금요일 (구북 보자흑-홍하 원양)  제 5일

8시 출발.

그러나 이곳 호숫가의 이른 아침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쉽게 떠나지를 못하고 사진 찍기에 열중한다.

지난 밤의 흥분도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민속춤이 끝나자 춤꾼들과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과 우리 일행들이 한데 어우러져 손을 잡고 큰 원을 만들면서

신나게 한바탕 추웠던 그 밤.

짧은 만남이었지만 우리 일행을 정성껏 떠나 보내려고 양쪽으로 도열하여 불러주던 노래와 박수.

할머니의 거친 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련다.

 

홍하로 가는 길.

고속도로를 내느라 널찍하게 뚫려 있지만 아직 아스팔트를 깔지 않아 버스가 춤을 춘다.

내가 가지고 온 누룽지를 나누어준다.

여행 중반기가 되면 여기 음식이 신물이 나서 한국 토속적인 음식이 그리워질 때가 되었다.

그동안 준재벌집 3자매가 수시로 내놓은 “일본표 웰빙 음식”에 비하면 대단히 소박하지만.

서산 언니들이 환영을 하며 소곤거린다.

사실 자신들도 누룽지를 가져 왔는데 저들이 내놓는 간식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차마 못 내놓고 있었노라고.

그러자 내 뒤에 앉은 싱글녀가 용기를 얻은 듯 생 김을 한 속 꺼내어 두 장씩 돌리면서 차멀미에 좋다고 권한다.

김을 뜯어 먹다가 차가 요란하게 흔들리자 김을 잡은 팔을 뻗어 아예 춤추듯 흔드는 선배K.

이를 보고 그 일행들이 따라서 양 손에 김을 잡고 흔들어 마치 치어 걸들의 응원모습 같아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느 만큼 갔을까. 큰 길 옆에 새로 주유소가 지어졌는데 아직 0pen하지 않아 비어 있지만 우리는 그곳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잠시 햇빛을 피하는 그늘에서도 버스안에서의 여흥이 식지 않았는지 그 일행들은 K의 지도를 받으며 춤을 춘다.

널찍한 비포장도로가 끝나고 왕복 2차선 좁은 도로가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높은 산길로 들어선다.

굽이굽이 높은 산길을 돌아 내려가면 큰 도시가 나타나고 또다시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르다 내려가면 신기하게도

또 큰 도시가 나타난다. 집들은 왜소하지만 새로 지은 관공서들은 너무 크고 육중한 느낌이 왠지 어설퍼 보인다.

조그만한 집 출입구 둘레에는 빨간색 종이에 가족들의 건강과 부자되기를 기원하는 문구가 인쇄된 띠가 집집마다 붙어 있다.

 

5일장이 선 시장에 내려 장 구경을 한다.

과일 흥정을 하는 일행들과 헤어져서 혼자 카메라를 들고 시장 속을 누빈다.

여기저기 잡화점을 구경하다가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서니 빙 둘러앉아 화덕에 석쇠를 걸고 하얀 떡같은 것을 구워 먹는

광경을 본다.(나중에 그것이 삭힌 두부라고 들었다) 

국수도 팔고. 힐끔 힐끔 쳐다보는 그들에게 실례가 될까봐 사진을 못찍고 오락가락하다가 먼 발치에서 슬쩍 한방 찍는다.

고기 파는 노점에서는 냉장 시설도 없이 그냥 돼지고기를 썰어 판다.

 

 

일행들이 사온 과일을 먹으며 지루한 버스 여행이 계속 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 화장실로 직행.

그저께 5일장에서 사먹은 단옥수수를 너무 과식했는지 그 날 점심부터 뱃속이 불안했는데 이젠 식욕마저 떨어져 버렸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홍하 원양에 도착.

다락논이 있는 노호구 풍경구에서 일몰 감상.

그러나 나는 간이 화장실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며 불안한 뱃속을 달래야만 했다.

 

아까 버스에서 가이드 李선생이 설명해준 내용을 간추려본다.

 

홍하 원양에 사는 소수민족은 하니족이다.

하니족은 유목민인데 티베트족인 장족에서 비주류로 분리되어 청해성에서 이곳으로 이동해왔다.(AD600년경) 

해발 1600m 이상되는 험준한 산 정상 부근에 터를 잡고 산비탈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어 쌀농사를 지어왔다.

1400여년을 조상대대로 이어져 오면서 집 터 부근부터 시작된 논이 산 아래쪽으로 계속 논을 만들다 보니

무려 3000만평이 넘는다.

오늘날에는 전문가 집단(주로 사진작가)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드디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자연유산에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이렇게 수많은 다락논에 어떻게 쌀농사를 지을 수 있었는지를 기록한 자료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들의 문화나 언어는 그대로 놔두고 문자는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중국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중국어와 문자를 사용하지만

가정에서는 지금도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곳은 연 강수량이 1600mm이상이고, 연중 안개가 자주 끼어 주변에 물을 흡수하는 식물이 자라고 있어서

물공급에 도움이 된다.

특히 토양은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는 찰흙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산 꼭대기 논을 채운 물이 자연스럽게 아랫 논으로

흐르도록 배수 시설을 해놓았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수많은 다락논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구불구불한 논두렁과 좁은 논바닥을 기계가 아닌 인간이 손수 곡쾡이와 삽으로 땅을 파거나 물소가 논을 갈고

써래질을 하여 이룬 그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터전이 산 아래로 계속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모내기를 하려고 논마다 가득 물이 채워져 있어 장관을 이루는데 해가 서산으로 기울며 붉은색 구름이 논 물에 비치어

붉은색으로 변한다. 주변에서 일몰을 지켜보던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은 사진기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다.

 

호텔로 돌아와 체크 인.

마사장은 이곳에는 변변한 숙소가 없어서 그나마 깨끗한 곳을 선택했는데 여인숙 수준이라며 걱정을 많이 한다.

이곳도 나평처럼 다락논에 모심기 위하여 물을 가득 대놓는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만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1년중 한달만 위하여 호텔을 많이 신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숙소사정이 매우 열악하단다.

생각했던 것보다 널찍하고 깨끗한데, 다만 욕조가 없고 더운 물이 약하게 나와 몸을 뜨거운 물에 푹 담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높은 지역에서 그런 것까지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호사스런 생각이 아닐까?

소화제를 얻기 위하여 서산 언니들 방으로 갔다.

친구의 큰동서와 그 친구분은 고향이 서산이라서 그 옆동네인 당진에서 자란 나는 정서가 비슷한 두 분을

서산 언니라 부르며 잘 지내고 있다.

친구분은 남편이 약사여서 30여년간 조수 노릇을 하고 있다며 소화제를 한 판 건네 주신다.

 

 

 

2007년 3월 3일 토요일 (홍하, 원양)  제 6일

새벽 4시 40분 Morning call.

숙소가 얼마나 열악한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잠을 설쳤다.

5시 30분 아침 식사- 찐계란, 흰죽, 카스테라빵, 우유 -이른 새벽이기도 하지만 입맛이 없다.

6시 출발. 일출을 보기 위하여 일찍 출발하는데 찬 새벽 공기를 대비하여 단단히 차려 입고 나선다.

 

도이수 풍경구 전망대에서 다락논을 내려다 보며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가이드가 따뜻한 커피와 생강차를 큰 보온병에 준비해 와서 많은 일행들이 후후 불어가며 몸을 녹인다.

다락논 골짜기 아래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 오른다.

이 지역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안개가 계단논을 타고 위로 피어 올라오면 물방울이 되어 다시 논으로 떨어진단다.

드디어 빠알간 태양이 떠오르고 빛이 구름 사이사이를 비추어 주는데 그 빛을 받은 구름이 다락논의 물에 비치어 장관을

이룬다. 이 광경이 성스러워 보였는지 성당팀은 조용히 성가를 합창한다.

다시 빠다 풍경구로 이동하여 전망대에서 아래쪽으로 3000단이 넘는 계단식 논을 세어보다가 그만 눈이 어지러워진다.

논둑에 작은집이 보이는데 농기구를 임시 보관하거나 잠시 쉬기도 하고 바쁠때는 멀리 떨어진 집에 가지 않고 아예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한단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 와서 근처에 5일장이 선 시장을 구경하러 나간다.

이미 몇차례 장구경을 한터라 호기심은 덜했지만 그래도 야채시장에는 볼게 많다.

차창 밖으로 보았던 밭작물중 완두콩이 많이 재배되고 있었는데 야채가게에서는 완두콩이 줄기채 잘라서 시금치처럼

다발로 묶어 판다.

완두콩은 콩 뿐만 아니라 어린 콩깍지도 살짝 데쳐서 기름에 볶아 먹기도 하지만 줄기도 야채볶음 요리를 해먹는다.

길옆에서는 살구 비슷한 과일이 있어서 20위안을 내고 한보따리를 샀다.

먹자 골목에서는 여전히 발효시킨 두부를 석쇠에 굽고 한쪽에선 쌀국수를 끓여낸다.

 

숙소로 돌아와서 점심 식사를 한다. 가지고 있던 밑반찬들이 모두 식탁에 오른다.

오늘 저녁에는 하니족이 사는 마을에서 돼지를 잡는다 하고 내일은 곤명으로 가면 식사가 풍성할테니까 가능하면

오늘 점심에 모두 털어내고 싶은거다. 밑반찬중 매실 장아찌가 입맛을 돌게 한다.

깨끗이 씻은 매실을 망치로 두드려 씨를 빼고 설탕에 재워 석 달 정도 있다가 건져서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무쳐서

통깨를 뿌려내면 매실 장아찌가 된다.

매실청은 물을 타서 쥬스로 마시던가 김치 담글 때 양념에 넣으면 잘 시어지지 않는단다.

고추장 담글 때도 매실청을 넣으면 독특한 맛이 난다나.

 

다락논 가운데 있는 하니족이 사는 마을에 간다.

용인 민속촌 처럼 여기도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이곳은 전시용이 아니고 조상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인데 쌀농사를 지은 부산물인 볏집으로 만든 초가지붕이 얹어져 있다.

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하였다.

1층은 돼지우리이고, 2층이 살림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컴컴하여 한참을 두리번 거리니 한쪽은 부엌이고 그 옆에 간이

침대가 보이는데 그 집의 가장 연장자가 사용한단다. 그 위에 있는 다락방에는 자식들의 방이란다. 사다리가 걸쳐 있다.

만약에 화재가 난다면 어떻게 가족들이 빠져나올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매우 비좁고 복잡하다.

부엌 천정에 매달린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출입구 벽에 걸린 손바닥만한 깨진 거울과 빗이 이들의 고단한 삶이 배어있다.

마을 골목에서 물레를 돌리는 할머니를 사진 찍었더니 돈을 내란다. 잔돈을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는데 무어라 소리 지른다.

돈이 너무 적다는 얘기같은데 내가 가진 잔돈이 그것 뿐이니 어쩐담.

골목에 어린 여자 애들이 빙둘러서서 한 아이를 달래주고 있다.

상황을 살펴보니 마사장이 작년에 이 곳에 왔을 때 찍었던 사진을 조금전 나누어 주었는데 사진 속에 한 아이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시 찍어서 내년에 올 때 갖다 주겠다고 하니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금새 밝아지며

사진포즈를 취해준다. 해맑은 천사들!

마을 광장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박물관에 들어가 하니족의 역사자료를 살펴보고 대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니 방앗간에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방아를 찧고

연자방아랑 맷돌를 돌렸던 이들 조상들의 지혜가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내려다만 보았던 다락논 논둑길을 걸어본다.

논둑의 높이가 2m정도로 매우 높고 단단한 찰흙으로 되어 있어서 논에 물을 가두는데 유리했겠다.

오리가 헤엄쳐 다니고 물소가 풀을 뜯고 논둑에 토란도 심어져 있다.

어떤 논에는 볍씨가 뿌려져서 싹이 트고 있었는데 하니족들의 모내기는 여자들만 한다나.

제사는 남자들만 참가하고.

하니족의 여성들은 인습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어떻게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다시 마을로 올라와서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상가집을 만나 장례 행렬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은 검은옷을 입고 머리에 베로 만든 띠를 두르고 있는데 하나도 슬퍼하지 않는다.

하니족은 결혼식을 가장 슬픈날로, 장례식은 축제의 날로 생각한단다.

힘든 노동을 하며 살다가 제 운명을 다하면 비로소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고 축포를 쏘아 올린단다.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광장에서 마을 젊은이들의 전통춤 공연을 보게 되었다.

소박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공연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마지막 순서는 우리도 같이 합세하여 스텝을 맞춰가며 춤을 춘다.

마을 회관에 차려진 저녁 식탁에는 이 동네에서 잡은 돼지고기 요리가 매우 푸짐하다.

돼지고기 수육과 그동안 먹다 남은 김치로 만든 돼지김치찌개, 족발, 뒷켠에서 열심히 구워다 주는 숯불구이랑....

게다가 전통옷을 입은 촌장님과 아가씨들이 불러주는 권주가에 이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하니족 마을 사람들의 정성에

흠뻑 취해본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이 마을을 떠나면 남은 고기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한단다.


 

 

 

 

2007년 3월 4일 일요일 ( 홍하 원양-곤명)  제 7일

8시 곤명을 향하여 출발.

오지로의 여행 일정이 끝나고 운남성 성도인 곤명으로 향한다.

해발 고도 1600m에 있는 원양 시내를 빠져 나와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내려 오면서 뒤차창을 통해 보니 마을이 산 꼭대기에

형성되어 있고 아래로는 눈길 닿는데까지 다락논이 이어져 내려간다.

남미를 다녀온 사람들은 산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을 보며 꼭 마추피추에 온 것 같다고 한다.

가파른 산비탈을 내려와 新원양에 로컬 가이드를 내려주고 평평한 고속도로를 달린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밭에서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계농이 아닌, 사람들이 직접 농사 일을 거드는데 여자들이 많이 보인다. 남자들은 어디서 무얼 하길래....

8억 인구가 이런 농사를 짓는다 하니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싼 농산물들이 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온것이리라.

상념에 빠져 있다가.....졸다가.....많은 시간을 달리다가 내린 곳은 건수라는 도시.

오랜시간 굳어 버린 다리 근육도 풀고 이곳의 역사적인 유적지 한 곳도 보고 점심도 먹는단다.

 

 

朱家花園이라는 큰 고택에 들어간다.

주가화원이란 청나라 말기에 이 지방의 가장 큰 토호 세력이었던 주씨 집안의 대저택을 이미한다.

마약 장사, 말 장사, 광산도 가지고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 땅을 매입하여 3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저택이다.

청대 말 신해혁명 때 정치세력에 휘말려서 갑자기 쇠락하여 많은 동지들이 살해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아 산속으로 피신해

들어갔는데 그 후 종적을 알 수 없단다.

1940년대에는 군 부대가 들어와 사용하다가 70년대에 정부에서 인수하여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19C말에 지어진 중국 건축물은 목재 색깔이 진해서인지 대체로 어둡고 무늬가 매우 복잡하여 우리의 것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점심 먹었던 식당은 매우 크고 훌륭한데 화장실은 어쩌면 그리도 열악한지....우리의 80년대를 보는것 같다.

 

 

다시 버스는 달린다.

끝없이 펼쳐지는 채소밭을 보다가 어느 만큼에서는 오렌지 밭이 펼쳐진다. 산 계곡에도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마사장님이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파는 오렌지를 한 아름 사들고 들어온다. 시원한 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드디어 곤명에 도착.

큰 도시답게 새로운 건물들이 우뚝 서있는 틈새에 우중충한 옛 아파트 건물들이 끼어 있는데 고층인데도 발코니 전체를

쇠창살을 하여 매우 답답하고 살벌하게 느껴진다.

마치 베트남의 하노이에 온것처럼. 그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고 집안에 큰 금고를 두고 온통 쇠창살을 달고 산다.

여기 운남성은 중국에서 변방에 속하는 곳인데도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넓은 길을 뚫고 큰 건물이 들어서고 하는것을 보니

경제 성장률 8%가 실감나게 느껴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골에서 젊은이들이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너도 나도 도시로 몰려들 수 밖에.

마사장은 여기에 있어 보니까 어떤 투자를 하면 성공할지 돈이 보인단다.

왜냐하면 이곳 상황들이 우리의 80~90년대 상황과 아주 흡사 하단다.

 

 

BANK HOTEL 체크 인.

널찍하고 시설좋고. 우선 샤워부터 한다.

오지에서의 묵은 때를 말끔히 털어낸다.

오지의 자연환경에 매료되고 그들의 순박한 눈망울과 미소가 아름답지만 역시 나는 속물 인간인지라 편하고 깨끗한 시설에

안도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

한국의 밑반찬이 필요없는, 입맛이 착착 달라붙는 중국 요리들....게다가 현지 여행사 차장님이 쏜 레드와인까지 곁드려서

우아하게 식사를 즐긴다.

 

 

일행들과 시내구경을 나간다.

이곳의 특산물이 보이차인데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제조연도가 오래될수록 비싸다고 하는데 4년이상 된 것은 절대로 없으니

바가지 쓰지말라고 마사장이 누누히 강조한다.

여기저기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차 전문점에서 서산언니들이 중국차를 산다.

호텔 로비에도 차 전문점이 있어서 좀 전에 산 가격과 비교해보자고 들렀던 것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야  말았다.

가게 점원이 우리보고 우선은 앉으란다.

2종류의 차를 가지고 와서 찻 물을 끓이고 조그만 토기로 만든 주전자에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넣더니 따라 버린다.

두번째 물을 붓고 조금 있다가 찻잔에 따라 주면서 맛을 보란다. 또 물을 붓고 맛을 보고...보통 네번 정도 우려 마신단다.

다른 종류의 차도 똑같은 방법으로 맛을 보고...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순전히 보디 렝귀지와 직감으로 의사 전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당신이 우리한테 어떤 차를 가장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느냐고 하니 어느 하나를 가리키며 제일 좋은 차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50g에 45위안.   50g에 255위안짜리도 있지 않냐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은 이 것을 제일로 친단다.

그가 권하는 차를 맛보기로 했다. 차잎이 돌돌 말려서 마치 파란 씨앗 같은데 두번 세번 우려낼수록 맛이 더욱 진해지면서

끝맛이 단맛이 난다.

마치 감초처럼.  네번 정도 우려내니 차 잎이 다 펼쳐진다. 모두들 그 맛에 반하여 구입하기로 하였다.

종이 상자에 비닐 봉지를 넣고 차를 가득 담아주는데 톡톡 쳐서 쑥 들어간 만큼 듬뿍 담아준다.

모두들 자신의 종이 상자를 진지한 표정으로 톡톡 치고 있으니 점원 총각이 웃으워 죽겠단다.

뒷늦게 들어온 일행이 합류하여 그들이 시내에서 사온 꽃차의 맛을 보고...

 

 

난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와 객실로 들어가니 내 룸메이트가 늦은 시간인데도 내가 안들어와서 걱정하고 있었단다.

도란 도란 지나온 여정을 얘기하며 내일 입을 옷과 영하 5도인 한국에 들어갈 때 입을 옷을 챙겨 놓는다.

 

 

 

2007년 3월 5일 월요일 ( 곤명 )    제 8일

7시 Morning call   

지난 밤 여러잔 마신 중국차가 이뇨작용을 철저히 하느라 자다가 여러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8시 아침 뷔페.

어떤 여행은 계속 뷔페 음식을 먹기가 지겹기도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중국식으로 먹다가 가끔 서양식 뷔페 음식을 만나면

아주 반갑고 상쾌해진다.

여러 종류의 넛트에 우유를 부어서 먹고 요플레에 과일 통조림을 한껏 먹으니 뱃속이 개운해진다.

 

9시 출발. 오늘은 곤명에서 하루를 보내고 자정 쯤에 비행기를 탄다.

곤명 큰 길에는 차도가 있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다니는 길이 인도와 분리되어 있다.

곤명은 북쪽으로 곤륜 산맥이 가로 놓여 있어서 찬기류가 넘어오지 못하여 겨울에도 따뜻하고 건조하단다.

여름에는 29도이상 올라가지 않으며 매일 소나기가 한차례씩 뿌려줘서 열기를 식혀주어 시원하단다.

그래서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로 이름이 나있고 여러 국제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마사장은 지난 밤에 여행사를 하는 일본인과 이곳 중국인과 셋이서 운남성의 투자가치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홍하원양에 호텔을

짓자고 의견을 모았단다.

다락논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올텐데 그들을 수용할 호텔이 턱없이

부족한데 자연유산으로 결정되기 전에 호텔을 지어 보자는것.

중국은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허가를 얻으면 건축비만 들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자금으로 호텔을 지을 수 있단다.

3성급을 지을까? 5성급을 지을까? 셋이서 호텔을 지었다 ....부수었다.... 밤늦게 까지 여러 채의 호텔을 세웠다고 웃는다.

 

 

리프트를 타고 서산공원에 오른다.

화창한 날씨와 울창한 숲, 산새들의 지저귐, 멀리 왼쪽으로 곤명호가 보이고....

옆에 앉은 룸메이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앞쪽 리프트에서는 노래소리도 들려온다.

리프트에서 내린 후 돌길을 따라 내려온다.

용문 석굴. 70명의 석공들이 13년동안 밧줄에 매달린 채 오직 손으로 파서 만들었다는데 돌계단 하나하나가 끌로 다듬은 흔적이

그대로 있어 오직 佛心 하나로 이런 정성을 쏟았다는 생각이 든다. 

난간은 이 지역에서 나오는 대리석으로 마감을 했고.

서산공원을 다 내려오니 기념품 파는 가게들이 즐비한데 한국말로 호객 행위를 한다. 게다가 한국돈을 받고.

서산 언니들이 불교용품 사는걸 구경하다가 나도 그속에 끼어 저렴하게 염주를 하나 구입했다.

 

 

점심식사-오지 여행하느라 제대로 못 먹었을거라며 몸 보신 시켜준다고 7가지 약재를 넣은 탕으로 마련된 약선식을 먹었다.

게다가 약재를 넣어 만든 술도 마셔보고.

탕 그릇이 7개나 나왔는데 입에 맞는 1~2가지 빼놓고는 여간해서는 손이 가지 않는다.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한 마리분이 그대로 탕그릇 속에 들어 있어 국자를 넣었다가 섬짓 놀란다.

 

 

곤명 시내에 있는 대관루에 간다.

입구에는 튜울립꽃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호수 주변에는 수양 버들이 바람에 나부끼어 봄의 운치를 더해준다.

누각이나 정자에는 시인 묵객들의 글을 통해 대단한 곳으로 묘사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여기 저기 둘러앉아 카드놀이나 마작에

열중하는 중장년층이 많다.

가족 단위의 행락인들을 보면 거무스름한 옷차림에 하나같이 보온병을 들고 있다. 차를 즐겨 마시는 습관 때문이리라.

 

 

곤명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는 원통사에 간다.

절에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겹벚꽃이 활짝 피어 있어 발걸음이 가볍다.

경내에 들어서자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대한 향로에 꽂힌 많은 향과 향 내음.

무엇인가를 염원하는 곤명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표정도 제법 진지하다.

일행중 불교 신자들도 여기에 합세한다.

 

 

취호 공원.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는데 특히 노인들이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나라 파고다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애완견을 끌고 나와 산책을 즐기는 유럽 노인들에 비하면, 여기 중국 노인들은

적극적으로 시간을 즐기는 모습에서 외롭지 않은 노후를 보내는것 같아 더욱 좋아 보였다.

중국 지도자 모택동이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하면서 공원에서 노인들이 氣를 펼 수 있도록 노인 복지 정책을 세웠다나.

여기저기 산책하다가 찻집에 들러 운남성의 특산품인 보이차를 마신다. 잔을 비우면 종업원이 잽싸게 와서 잔을 채워준다.

근데 솔직히 보이차 맛을 모르겠다. 다이어트에 좋다고는 하는데...글쎄....

 

 

취호 공원 뒷쪽에 있는 300년 되었다는 석병회관에서 저녁을 먹는다.

청나라 시대의 건물이라는데 매우 고틱하다.

2층 목조 건물인데 마당을 끼고 있는 안채를 3번 넘어가서야 본채가 나온다. 문살의 문양도 독특하고 천정도 매우 높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카메라를 가지고 마당으로 나와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바빠진다.

저명인사들이 곤명에 오면 꼭 여기를 거쳐가야만 대접 받은 것으로 여긴다나.

음식 또한 꽤 고급스럽다.

접시에 깔끔한 고기가 나와서 다들 한 조각씩 맛있게 먹었는데 후에 들어온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비둘기 고기란다.

그 후로 그 접시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전통복장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소수민족 아가씨들이 낙랑한 목소리로 권주가를 불러준다.

 

 

공항 출발 시간이 넉넉히 남아서 우리 일행은 중국 전통 마사지를 받게 되었다.

나평에서 받았던 것보다 훨씬 숙달된 아가씨들이 전신을 안마해주는데 매우 시원하다.

전신 마사지가 끝난 후에 발 마사지까지 해준다.

이 아가씨들은 외모로 보아서는 어느 소수민족 자녀들일텐데 도시로 돈벌러 나와서 마사지 교습을 받고 이 일을 하여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주겠지.

눈을 감고 이런 상상을 하다가 다 끝났다는 말에 수고했다며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곤명 국제 공항.

8일동안 우리와 함께 해준 운전 기사와 가이드 李선생과 이별한다.

"신콜라!" 그동안 배운 중국어로 고맙다고 외친다.

짐을 부치고 나서 화장실로 향한다.

양치질을 하고 입었던 여름 옷을 벗고 겨울 옷으로 갈아 입는다.

수속을 마치고 들어가면 조그마한 면세구역.

일행중 S는 면세점에서도 물건 값을 깍는다. 똑같은 물건을 누구는 10위안에 사면 이 사람은 2~3위안에 산다.

지갑속에 빳빳한 중국 화폐를 한 다발 넣고 다니면서 물건 값을 흥정할 때 사정없이 후려쳐서 싸게 구입하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쭈글쭈글한 소수민족 파파 할머니에게도 인정사정 없이~


 

 

 

2007년 3월 6일 화요일 ( 인천공항 )    제 9일

자정 무렵, 곤명 국제공항 이륙.

마사장은 기내식이 보통 내릴때 쯤 나올테니 기다리지 말고 잠을 자라고 했는데 왠 걸 이륙하고 조금 있으니 기내식이 나온다. 

승무원이 에그 스크램불? 아니면 펌킨 스프? 선택하란다.

난 에그 스크램불 선택하여 받아 놓았는데 내 옆의 여자는 펌킨 스프를 받아 놓는다.

그러더니 매우 난감해 하며 내 것을 쓰윽 살핀다. 자기 것을 가리키며 "sweet?" 하길래 아마도 그럴거라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바꿔줄까? 매우 좋아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승무원이 호박죽을 가져가고 계란접시를 그녀에게 내려줬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어시간을 영어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중국인인 그녀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인천공항에서 바꿔 탄다는데 나의 다녀온 여행지를 묻길래 내 여행자료를 같이 보며

짧은 내 영어가 매우 고생을 한다.

보통 중국의 지명을 우리는 한문을 우리식으로 읽는데 그들의 발음은 중국식이다.

예를 들어, 昆明을 우리는 곤명이라 읽고 중국인은 쿤밍이라 읽는다.

여행자료에 한문으로 쓰여있는 지명과 사진까지 있어서 그녀는 금방 알아보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녀의 팔찌는 내가 산 팔찌(염주)와 똑같아서 가격을 비교하고 환률에 대하여 내 수첩에 필담으로 적어가며 이야기를 한다.

 

마침내 인천공항. 아침 5시.

그녀는 통과 여객으로 길이 갈린다. Have a nice trip!

간단한 입국 수속을 끝내고 가방을 찾아 나서는데 선배 K가 같이 가잔다.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서산언니들을 기다린다.

화장실에서 겨울옷으로 갈아 입느라고 시간이 걸리는것 같은데 선배K가 꽤나 재촉을 한다.

그냥 혼자 가시지...

여행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혼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름대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8일간 같이 식사하고 같이 어울렸던 서산 언니들.

그 중 약국하는 분은 눈,코,입이 서산 마애불의 가운데 부처님과 닮았다.

충청도 사투리로 진솔한 이야기를 잘 하셔서 늘 즐거웠는데, 다음 여행 때 또 만나자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일산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내 앞에 있는 선배 K는 버스에 오르지를 않고 뭔가를 뒤지느라 내가 먼저 가방을 들고 올라갔다.

한참 후에 그는 큰가방을 들고 매우 힘들게 오른다.

자리에 앉자 마자 그는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마치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싶어서 동행하자고 한 듯....

대학 2학년 미팅 때 만나 졸업하자 마자 결혼. 아들 3명. 남편은 치과의사. 매우 유복한 생활.

내과 의사인 큰아들과 재벌집에서 시집온 며느리와 손주 1명, 매일 파출부가 와서 일을 봐준다는 전업주부인 며느리 이야기를

듣다가 더이상 듣기가 역겨워져서 중간에 끼어 들었다.

"선배님!  선배님은 지금 한국의 상류층 생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힘들게 살고 있는 중~하류층이 이런 이야기 들으면

매우 화가 나요. 이젠 그만 하세요!"

선배 K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는 항상 친구들을 몰고 다닌다. 그리고 늘 부유한 티를 내고.

이번 여행에도 쉬는 시간 틈틈히 그들을 거느리고 스포츠 댄스를 가르친다고, 남의 이목을 끌게 하는 행동을 즐겨한다.

사회생활을 않해봐서 일까? 

그래도 10여년 평생 교육원에 다니고 있고, 60대 중반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데....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경제력을 자신 앞에 내세워야 하는 그녀의 자존심이 참 가련하기도 하다.

일산 도착. 큰 가방을 들고 내려야 하는데 선배는 들지를 못하고 쩔쩔 매고 있다.

할수없이 선배를 먼저 내리게 하고 가방을 내려 주었다.

도대체 이 선배는 혼자 할 수 있는게 무얼까? 그래서 늘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걸까?

길가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모친을 기다리던 그녀의 아들이 뛰어와서 엄마를 포옹한다.

공주님~ 안녕히 가세요!

 

 

길가에 기다리고 있는 남편차로 달려간다.

아직도 이른 아침이라서 잠이 덜 깬 듯 집에 도착하자 다시 잠자리로 들어가는 남편.

9일만에 돌아온 집안. 깨끗하다. 어제 손수 청소를 다 해놓았단다. 이 감동!!!

우선 샤워부터 하고 잠 깰세라 조용히 가방의 짐을 풀러 정돈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아침 밥을 짓는다.

 

 

후기:

이렇게 9일간의 여행이 끝났습니다.

며칠전 여행사에 들렀더니 어디가 가장 인상에 남더냐고 묻길래 한마디로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노란 유채밭과 다락논은 뒷배경이 되고, 5일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눈망울과 보자흑의 밤마실에서 만났던 민속 춤을 추던

할머니의 거친 손, 권주가를 불러주던 앳된 소녀들이 크게 클로즈 업 되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요즘 TV에서 방영하는 黃河와 茶馬高道 프로그램을 보며 중국지도를 펼쳐놓고

지명을 익혀가고 있습니다.

학기초 바쁜 선생님들께 이 여행기를 보내며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사진까지 보내려니까 메일 용량이 커져서 매우 난처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읽으시는대로 삭제하여 메일용량을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